2014년 4월 21일 월요일

난 나 편하자고 공개입양을 했습니다.

한 개인의 경험이 모두의 경험은 아니기에 또 다시 글을 쓴다는 것이 부담이지만 뭔가는 적어야겠다는 마음의 충돌질로 다시 글을 적습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외롭고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만 삶이 힘 든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 자체가 힘겨움입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자신의 정체성(입양인)을 발견한 아이들은 놀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뭐지?

어린 나이에 공개 입양을 했다고 해서 그 아이의 상처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상처를 잘 다스릴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일찍 공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뿐 공개 입양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영원한 비밀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시한 폭탄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부모는 매일 매일을 천당과 지옥을 왔다리 갔다리 하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 징검다리라는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어머니가 자주 오셨었는데 비밀입양을 하신 분이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입양한 것을 아시니까 아내에게만 말을 했더라구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언제부터인지 그 분은 도서관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어찌 보면 나 편하자고 아이들에게 입양을 공개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가 겪어야 할 그 혼란을 지켜보기가 때로는 지켜보는 것 조차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미리 알려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고통을 어떻게 잘 다스려 나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공개입양은 사실 1999년 정도에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입양홍보회를 만든 분들 덕분이었습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5월 11일 입양의 날도 만들어졌고요.

누구나 술 마시면서 나라는 존재는 왜 이렇게 밖에 되지 않을까? 울면서 한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입양과 관련없는 사람들도 술 마시고 많이 웁니다. 그리고 입양이 된 사람만 아니라 입양한 사람들도 고통이 있습니다.

입양한 엄마가 입양된 아이에게 너는 내가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고 생각하나요?

둘째를 입양하고자 할 때 한 기관에서 입양 부모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한국입양홍보회 직원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원래 입양기관들하고 사이가 그렇게 않좋아요?

건모(건강한 자녀양육을 위한 입양가족 모임)에 글을 쓴 한 입양부모의 글을 읽으면서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공개한다고 떠벌리고 모임한다고 다니다가 아이들이 자라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이 글은 그 당시 교육을 받았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나는 첫째를 이미 입양한 상태였고, 한국입양홍보회에서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나름 회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입양 교육을 받으러 온 다른 분들이 듣지 못했던 것이 들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글을 읽고 내가 공개입양을 한 이유라는 글을 적은 것입니다.

한 성인 입양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도 아이를 낳았고, 상담을 한다. 자신과 같은 아이들(입양인)을 상담했다. 공개입양은 해서는 안된다는 그녀의 글을 읽었지만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사실 그녀는 우리 사회가 공개입양이 현재보다 미미할 때 자란 세대의 입양인이기에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한 입양부모의 글에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워스트라 부른다는 글은 너무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스스로의 직업군을 말씀하셨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자판을 누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입양을 공개하느냐 마느냐는 세상에 비밀이 있느냐 없느냐와 같은 구조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비밀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비밀입양을 해도 됩니다. 그리고 그 비밀이 지켜질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공개입양 어찌 보면 부모 편하자고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 아이가 힘들어할 때 자신이 힘들다고 하소연 할 수 있도록 공개해 버린 겁니다. 혼자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어찌 어찌 알아서는 이것을 혼자 고민, 고민하다가 삭혀버리지 않고, 나 정말 죽을 만큼 힘들어 나 어쩌면 좋아라는 말을 듣고 싶어 공개를 해 버렸습니다.

비록 너는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너는 내 아이다. 네가 힘들다면 말을 해. 다 듣지는 못하겠지만 최대한 듣고자 노력은 해 볼게. 사실 이게 내 솔찍한 심정입니다. 물론 아이와 갈등 있습니다. 아이를 혼내기도 합니다. 아이를 혼내고는 속상해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느 부모나 다 같은 마음이지 입양 부모기 때문에 가지는 특별한 감정은 아니라는 것 다들 아실 겁니다.

공개입양한 아이가 고통이 없다고요?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고통이 있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 잘 다스려 나가는지, 그리고 그 고통을 입양인이 혼자서 삭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와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공개입양을 하는 것입니다.

2014년 4월 21일

안녕하세요 열린사회 구로시민회 이광흠 사무국장입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울쩍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들 저하고 비슷하시죠?

1. 4월 15일 열린사회 신입 상근자 교육이 있었습니다.

2. 4월 16일 구로마을넷 회의가 있었습니다.

3. 구로시민회에서 논 공동경작(모네기, 벼베기 처험)단을 모집합니다.

첫 일정인 모네기는 5월 31일~6월1일이며 1인당 참가비용은 시민회 회원 4만원 일반참가자는 5만원(초등학생 이상), 미취학 무료, 뒷풀이비용은 각출, 교통비 별도)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카페( http://cafe.daum.net/openguro/7kts/1797 )에 있습니다.


4. 회원 및 후원인 여러분 세월호 실종자들의 무사 귀환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들과 사고 현장에서 살아 남았으나 충격으로 고통받는 생존자들과 그 가족 모두에게 위로가 있기를 기원해주세요.

또한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와 관련한 모든 일을 상식적이고 합당하게 처리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세요.









오징어

반편견입양교육을 하러 지방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다.

피곤해서 벌써 휴게소와 졸음쉼터를 들렸다. 다시 피곤도 하고 주유도 할겸 휴게소에 들려 오징어를 굽는다.

생각보다 주유비가... 음... 내 차가 무거운가??? 아님 넘 달렸나???

2014년 4월 20일 일요일

내가 공개입양을 선택한 이유

세월호 때문에 무기력증에 있던 내가 네이버의 건모(건강한 자녀양육을 위한 입양가족 모임)에서 명의 성인 입양인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입양부모들의 글도 읽었습니다. 그러다 어떤전문가들이 워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글을 읽고, 뭔가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으로 글을 올린 돌아와 글을 씁니다.

 

나는 아이를 입양한, 입양된 아이들의 아빠입니다.

 

우리 부부는 2006 6 첫째를 입양했습니다. 입양 상담을 받고 기다리다가 입양 대상 아동이 있다는 소식에 아이를 만나러 갔습니다. 아이를 처음만난 우리 부부는 잠이 들어있던 아이와 함께 가족이 되었습니다. 당시 공개입양을 택한 부모들도 상당수가 입양아동을 호적에 친자로 올렸었습니다. 호적상만이라도 구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아이를 입양으로 호적에 올리려 했기 때문에 아이는 위탁 형식으로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필요한 절차를 모두 밟은 후에야 서류상 아이와 가족이 있었습니다.

 

기관에서 처음 입양을 상담하면서 우리 부부는 혈액형도 상관없었고, 단지 딸이라면 좋겠다는 의사만을 밝혔습니다. 처음 입양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는 첫째는 딸을 입양하고 둘째는 아들을 입양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딸을 입양했지만 현재 우리는 둘째도 딸을 입양했습니다.

 

20064월부터 6첫째를 만날 때까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글로 적어 블로그에 올렸고, 간헐적으로 입양 가족으로서의 삶을 적어왔습니다. 입양을 하려는 자신과 아이를 입양을 했을 어떤 일들이 있을지 고민하며 적은 글들을 글을 쓰기 읽어보니 당시에 나는 첫째를 만나기 전까지 좋은 부모가 있을까라는 설램과 두려움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공개입양을 생각도 못하던 1999 스티브 모리슨(한국명 최석춘)씨와 한연희 씨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공개입양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만해도 우리나라 정서에 공개입양은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2014오늘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스티브 모리슨 씨와 한연희 씨를 비롯한 한국입양홍보회 초기 공개입양 부모들이 얼마나 힘든 시간들을 지나왔을까 생각하니 그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우리 부부도 아이를 입양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어디에 속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향 때문에 2006 한국입양홍보회에 가입을 하고도 그리 크게 활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건모(건강한 자녀양육을 위한 입양가족 모임) 만들어질 때의 이야기를 조금은 알면서도 지금까지도 건모에 깊이 몸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한국입양홍보회에서 반편견입양교육 강사 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이들과 같이 자라는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아이들에게 입양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닌 그저 가족이 되는 하나의 방법일 다른 것이 없다고 말을 하고 싶어 지금까지 강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입양홍보회에서 반편견입양교육을 다듬는 연구위원 대부분은 강의가 입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강사인 나는 반편견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그분들과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한국입양홍보회 연구위원들의 의견과 다른 반편견 교육을 진행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강사로서 강의 속에서 가질 있는 조금의 여유속에서 자신의 생각들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반편견입양교육을 진행하다보면 학생들은 강사가 입양한 부모라는 사실에 놀라고 좋아합니다. 그러니 입양부모가 아닌 다른 전문가들에게 반편견입양교육을 맏기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아이들과 함께 자랄 아이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첫째를 입양 2006 입양 부모들 안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보편화 아동 양육수당에 대한 것과 의료급여 1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양육하는데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과 받을 있다면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의 충돌이었습니다. 10만원의 아동 양육수당을 받으나 마나라는 주장과 일단 10만원이라도 받고 늘려 가야 한다는 입장의 충돌은 현재의 비밀입양과 공개입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자식들을 위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일어난 충돌이었습니다. 나는 모든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개개인들에게만 짊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정부의 돈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의료급여 1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의료급여를 신청하자 첫째 아이 이름만 달랑 들어간 종이쪼가리가 날아왔습니다. 아이 이름만 달랑 들어간 의료급여증을 가지고 병원에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때문에 많은입양 부모들이 의료급여를 신청하지 않았고, 정부에서는 만들어 놨더니 사용도 안하더라. 불필요한 제도는 없애야 한다는 기류가 있었습니다. 한국입양홍보회에 속했던 입양부모들이 지속적으로 이런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오늘과 같이 사전, 사후가 가능하고, 가족 모두가 들어간 의료급여증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부부가 아니 내가 공개입양을 선택한 이유는 거창하게 입양 문화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나와함께 살아가는 아이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내가 길을 다른 사람들은 쉽게 가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공개입양을 선택한 것입니다.

 

고난 주간과 세월호 소식으로 무기력해져 쓰기도 힘들어 하지만 부활의 소망을 품고 글을 마무리합니다. 8먹은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았던 첫째 딸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2013 1 22 블로거의 동영상을 옮깁니다. 다들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