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8일 화요일

안양천을 돌아보다

서을시서남권NPO지원센터에서 지원을 받아 관악구 푸른공동체 살터, 구로구 열린사회구로시민회, 금천구 절건모(절제로 건강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임)가 안양천과 관련한 의제학교를 준비하고, 그 첫 번째 강좌를 9 25() 오후 2시에 진행하였습니다.
 
지하철 1호선 구일역 1번 출구에 모여 구일역 아래쪽 안양천  상류쪽으로 이동 하며 허기용 (광명지속가능협의회 사무처장) 강사를 통해 안양천의 역사 및 현황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 후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 10/30 () 14:00 ~ 16:00 안양천 주변 환경 및 모니터링의 내용과 방법
16:00 ~ 18:00 사진으로 배우는 모니터링 및 캠페인
 
* 11/13 () 14:00 ~ 16:00 안양천의 현재와 미래 포럼
- 탄소 중립, 하천의 기능 및 역할 (안양천 명소화, 고도화의 악역향)
 
문의 : 박정란 (푸른공동체 살터 / 010-4710-7654)
 
* 서울시 서남권이란 강서구, 관악구, 구로구, 금천구, 동작구, 양천구, 영등포구를 말합니다.

2021년 9월 27일 월요일

기지개

2021년 글쓰기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2020년 새로운 세계로 이끈 코로나19 2021년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새로운 여행을 하게하고 있다.
 
코로나 19 상황은 언제 끝이 나는 것일까? 이 여행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요즘 작은 일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로 했다.
 
처음 코로나 19가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까지 오래 세상을 침묵하게 할 줄은 몰랐다. 그나마 지난 1년의 경험이 있어 그런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스크 쓰기를 비롯한 안전 수직을 지키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글쓰기 모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하다.
 
코로나 19 상황에서 구로시민회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해본다. 다들 어려운 시국에 회원들은 무슨 이유로 구로시민회에 기부금을 내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기부금으로 활동비를 받고 있는 데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
 
지난 2015년 구로시민회 활동을 그만 두었을 때 받았던 마지막 12월 활동비는 120만원이었다. 11 20일까지 근무를 했지만, 구로시민회는 12월 활동비까지 챙겨줬다. 그리고 2018 4월 다시 복직을 했을 때 받았던 활동비는 70만원이었다. 구로시민회 상근활동을 그만 두고 29개월 만에 다시 돌아오니 시민회 재정 상태가 말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나마 70만원으로 시작한 것은 지난 2012 3 40만원으로 시작했던 것 보다는 상황이 많이 좋아진 건가? 이때도 시민회가 어려워 상근자 2명이서 40만원씩 나눠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2013 1명이 상근을 하면서 100만원으로 인상되었다.
 
2012 40만원, 2013 100만원, 2014 110만원, 그리고 2015년에 120만원으로 활동비가 늘었다. 그런데 29개월 만에 돌아온 시민회는 2018년에 70만원, 2019 75만원, 2020 75만원, 2021 4대보험을 들었고, 실수령은 665,680원이다. 문제는 시민회 재정이 마이너스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내가 활동을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들 어려워진 것일까?
 
다시 복직을 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고민을 하고 결정을 했고, 그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은 내게는 아직도 유효하다. 때문에 가능하면 구로시민회에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활동을 계속 하고 싶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재정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현재 4인 가족의 가장이기에, 재정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현재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결국, 얼마 전부터 그 둘의 타협점을 찾아서 야간에 길을 나선다.
 
교회를 포기했던 그 쓰라린 경험을 또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 변명을 걷어내면, 하고 싶은 일을 재정 상황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은 철 없는 욕심 때문이리라.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 어려워요. 나 좀 알아주세요.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이가 50이 넘어도 포기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고, 그 일을 누군가 뒤 따를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구로시민회 활동가의 4대 보험을 만들었으니, 앞으로의 과제는 활동비를 높이는 일이다. 그 시간까지 몸 상하지 않게 몸 관리하며 지내려 한다. 누군가 내 뒤를 따라 구로시민회 활동가가 된다면, 재정 상황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라며 움츠린 마음과 몸을 풀어내려 기지개를 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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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9 28() 2021 7번째 글쓰기가 있는 날이다. 2021년 글쓰기를 시작하며 쓴 글을 게시한다. 5 11일 글감은 기지개.
 
1990년 생 어느 누구는 6년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다고 하고, 어느 시장님께서는 시민사회가 ATM기에서 돈을 빼서 사용하는 것 같다고 하시는 이 시국에,
 
살림이 어려운 시민단체에 도움을 주고 싶은 분은
 
https://webcm30.webcm.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openc2106&gid=guadminhttps://webcm30.webcm.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openc2106&gid=guadmin
 
 
사진은 구로구청에서 2012년 마을공동체만들기사업 역량강화 교육 참관 중 찍은 사진. 주민자치위원들 중심으로 진행되는 교육이었다고 페이스북이 알려준다.
 

2021년 9월 14일 화요일

안양천 자연형 하천 복원

서을시서남권NPO지원센터에서 지원을 받아 관악 푸른공동체 살터, 구로 열린사회구로시민회, 금천 절건모(절제로 건강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임)가 안양천과 관련한 의제학교를 진행합니다.
 
그 첫 번째 강좌를 9 25() 2시에 진행합니다.
 
얀양천(구일역 개찰구로 나와서 모임)에서 허기용(광명지속가능협의회 사무처장) 강사와 함께 안양천의 역사 및 현황 알아보기를 진행합니다.
 
참가 신청은
 
https://docs.google.com/forms/d/1qhUNlRQqAtkGr-yEJUMzmv0et9RnDeipV8oLBZY2cFs/edit
 
 
탄소중립을 위해선 안양천의 자연형 하천 복원이 중요합니다.
 
하천은 숲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열섬현상을 막아주는 공간임에도, 지자체 단체장, 국회의원들은 2020년부터 안양천 공원화, 고도화라는 이름으로 한 종류의 식재, 온갖 체육시설, 야간 조명 등 인위적인 시설물을 경쟁하듯이 설치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하천 보전 방법은 인위적인 시설물 설치가 아닌 자연 그대로 두었을 때, 하천 자정능력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2021년 9월 11일 토요일

이재명과 그의 지지자들에게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선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생각하며, 2016년에 적었던 글로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그의 지지자들을 향한 바람을 적어본다.
 
, 나는 더불어민주당에 큰 기대는 없다.
 
 
이재명의 쇼 2016. 01. 29.
 
이재명 시장의 복지 정책에 대해 새누리당에서 여러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이재명 시장에 대해 잘 모른다. 그저 내가 아는 건 그는 쇼를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지난 1 13일 서대문 형무소 역사박물관에 갔다가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에 갔었다.
 
조계사 뒷길로 소녀상 쪽으로 걸어가니 어르신들이 모여 하나 둘 떠나고 있었고, 의경들은 양쪽 진영을 갈라놓고 있었다. 수요 집회는 마무리 되었지만 문화인들의 예술행동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그냥 소녀상 앞에서 추운 바람에도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이들을 지켜봤다. 한참을 지켜보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림이 있어보니 이재명 성남시장이 왔다. 그 날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하며 일본과 위안부 협상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최선의 협상이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누군가 특히 정치인들이 어떤 행사에 잠시 얼굴 보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은 탓에 노래하는 예술가들만 쳐다봤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학생들과 이재명 시장은 계속 앉아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뭔가 어색한 모습이더니 시간이 지나자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사진은 한 장 찍어야 할 것 같아 찍었다.
 
이재명 시장은 눈이 내리는 가운데도 학생들과 한참을 앉아 있었다. 집에 돌아와 페이스북을 보니 어떤 분이 이재명 시장이 학생들과 앉아 있는 사진을 가지고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 사람이 학생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글을 봤다. 사진을 보니 내 주변에 있던 사람 들 중 하나가 찍은 사진인 것 같았다. 거의 내가 사진을 찍은 구도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뭔가 글을 쓸까? 생각도 했지만 나까지 이재명 시장에 대한 품평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또 이재명 시장에 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와 그냥 내 생각을 써봤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팽목항에 간 모습이나, 소녀상 옆에 앉아있는 이재명 성남시장이나 어찌 보면 쇼를 한다고 볼 수 있지만 나는 그래도 그들의 쇼가 좋다. 개인적으로 대통령이 없는 자리에 그들이 있어 안타깝지만 그들이 있어 좋다.
 
욕심이라면 나는 계속 그들의 쇼를 보고 싶다.
 
 
이재명? 이재명. 2016. 11. 22.
 
지난 11 4일 이재명 시장을 생각하며 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성남시 장애인택시비 인상과 관련해서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성남시와 각을 세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와 이재명 시장 지지자들로 추정되는 이들의 과도한 행위들로 인해 장애인단체 및 인권단체들이 성명서를 발표했고, 이 성명서를 개인적으로 지지하기에 성명서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 올린 글의 조회 수는 그리 큰 변동이 없는데 유독 네이버 포스트에 올린 글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댓글도 제법 많이 달렸는데 예전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때부터 지금까지 써 온 글 중에서 가장 많은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뭐 어떤 이들은 알바냐, 일배충이냐라는 말까지 하고 있네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이의 말처럼 유력한 대권주자로 떠오르고 있는 이재명 시장 이름을 팔아서 어그로를 끈 덕분에 네이버 포스트는 지난 11 21일 결국 조회 수가 일만을 넘어버렸습니다.
 
네이버 블로그는 지난 2015 7 22일 강화도로 물 주러 간 박근혜 대통령 뒷이야기를 찍은 미디어몽구 동영상을 링크한 이 후 방문자의 수가 확 줄었는데 네이버 포스트는 이재명 시장을 거론했다는 이유로 조회 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버렸습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네이버 블로그에도 같은 글을 적었는데 이 글을 쓸 때 조회 수가 165 밖에 안 되는데 네이버 포스트에 쓰인 글은 4만이 넘고 있어서 그 이유가 갑자기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조만 간 이재명 시장을 생각하며 라는 글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겠지요. 지금도 다들 댓글 놀이에 빠져서 댓글만 보는 것 같기는 하지만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에 대한지지 성명서를 옮긴 이유를 풀어봅니다.
 
나는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 장애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자유로이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주장은 자신들을 특별하게 대우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이들의 요구를 자신들을 특별하게 대우해달라는 것으로 바라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장애인들의 눈으로 보면 다른 이들은 하늘이 준 특혜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걷거나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움직일 수 있겠지만 장애인들 특히 중증장애인들 같은 경우 장애인택시를 이용하지 못할 경우 움직임의 제약이 상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택시에 대한 필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지자체에는 안가고 그나마 형편이 좋은 성남시에서 땡깡을 부리느냐는 분들이 계신 것 같은데 사회가 발전을 해야지 퇴보하면 되겠습니까? 잘하고 있던 곳이 퇴보하는데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 (장애인이동권을 넘어 그들의 삶) 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기에 성명서를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재명 시장을 생각하며 라는 글 때문에 포스트 조회 수가 일천을 넘겼을 때 어의가 없었는데 어제 같은 경우 일만을 넘기니 기가 막힙니다.
 
이재명 시장은 이제 유력한 대권 주자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재명 시장이 시원시원하게 말을 잘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재명 시장은 사람들이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다고 합니다. 예전 어떤 이 들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노무현 탓이라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을 그 내용보다 외형을 문제 삼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이재명 시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하게 합니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합리적인 말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방어를 하게 되면 그들은 넌 노사모잖아라고 말을 했습니다. 오해가 있을까봐 하는 말인데 나는 노사모 아닙니다. 선거 때도 다른 사람을 찍었습니다.
 
이제 이재명 시장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가지도록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쓰면 또 오해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적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나 구속 등에 대한 이야기를 현재와 같이 강하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재명 시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시원함을 줘서는 안 됩니다. 이재명 시장 그가 하는 말의 내용보다는 외형만을 보는 이들에게 저항감을 줄일 수 있어야 대권주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실패한 트럼프가 아니라 성공한 샌더슨이 될 수 있습니다.
 
이재명 시장을 생각하며 라는 글은 이런 이유로 적었습니다.
 
1. 성남시 장애인택시비 인상과 관련한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활동을 지지합니다.
 
2.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과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이나 공격행위를 반대합니다.
 
3. 성남시와 이재명시장은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더 많은 대화를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4. 이재명시장은 이제 개인 이재명이라기보다는 대통령 후보군에서 앞서가는 대권주자 중 한 사람입니다. 이재명 시장이 성공한 샌더슨이 되고자 한다면 소수의 아픔도 끌어안아야 합니다.
 
깡통의 깡통소리

2021년 9월 10일 금요일

잘가시라

8일 늦은 시간 이사회 카톡방에 열린사회강동송파시민회 경은아 전대표의 부고 소식이 올랐다.
 
9일 오전 일정을 마치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처음 계획은 장례식장에 들렸다가, 저녁에 있는 회의에 참석을 하려던 했는데, 장례식장에서 만난 강동송파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결국 저녁 회의는 참석을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강동송파 회원들은 다들 당황해하고 있었다.
 
강동송파 전 대표님 한 분은 장례식장에 나온 떡을 보면서도 경은아 같은 떡이네, 은아가 참 깔끔했는데라며 연신 경은아 대표 이름을 되뇐다.
 
강동송파 회원들이 한 명 두 명 모여들고, 조길례 전대표님이 지나가는 말로, 강동송파가 정이 있는 시민회야, 강동송파로 오는 건 어때? 라며 농을 치신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강동송파 회원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장례식장을 나섰다. 저녁 회의는 이미 참석 불가.
 
그나저나 멀리 광주에서도 손님들이 오셨다. 평소 활동하며 마주친 이들이 여러 곳에서 그녀의 마지막 길을 보려고 모여들고 있었다.
 
경은아 대표하고 찍은 사진이 있나? 살펴봤는데, 지난 2020 6 30일 열린사회시민연합 23기 총회 때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 기억하려고 올려본다.
 
당시에도 코로나 19 상황이라 처음으로 대면 총회가 아닌 서면 총회를 했었다. 총회는 마스크를 쓰고 진행했고, 사진도 마스크 쓰고 찍었는데, 마지막에 다들 그래도 한 번쯤 마스크 벗고 찍어보자고 해서. 마스크 벗고 찍었던 사진이다.
 
경은아 대표 잘 가시라.
 

2021년 9월 7일 화요일

고 리

악습의 고리를 끓을 수 있을까?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페이스북에서 그가 DP를 보았다는 내용의 글을 보았다.
 
내가 부대에서 조직적인 집합과 구타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내 바로 윗 기수들이 모두 남한산성으로 끌려갔고, 그 빈 권력의 공간에 나를 비롯한 후임들이 그 자리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만약 큰 변화 없이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갔었다면, 나 역시 누군가를 때리거나, 왕따가 되지 않았을까?
 
변화를 위해 노력하던 중 닥친 혼란, 그때 중심을 잡아주는 후임병들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사건이 터지고 나서 간부들은 자신들은 전혀 몰랐던 일이라고 다들 발뺌을 했었다. 아침을 먹고 집합, 저녁을 먹고 집합하던 그 상황을 간부들은 정말 몰랐을까?
 
사건 이 후 변해버린 후임병들의 모습 때문에 우리도 혼란스러웠는데, 간부들은 어땠을까? 그들이 지나가며 우리에게 한 마디씩 던졌던 말들. 어째 요즘 부대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고참들이 던졌던 말들, 후임들 군기를 잡아야 너희가 편하다는 그 말에 굴복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욱하는 성질에 한 대 쥐어박는 일은 있었는지는 몰라도, 집단으로 자행된 매타작은 없었다. 조직 생활에서 그 하나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기에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페이스북 글에 마음이 흔들린다.
 
혼자 무엇인가를 바꿀 수는 없다.
 
사건 사고 사례가 전파될 때마다 고참들은 이런 말을 했었다. 요즘 새끼들은 맞지 않아서 조금만 맞아도 죽어요.
 
말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군에서 후임병들을 그리 때리던 고참은 겁이 많은 사람이지 않았을까?
 
제대를 하고 부대에 간 적이 있었다. 민간인이 부대에 간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부대에 갔더니 아들 놈 한 놈은 잠깐 외출(?) 했다가 걸려서 군기 교육대인지 영창인가 갔고, 다른 한 놈은 아버지 왔다고 좋아하더라.
 
포대장이 잠깐 보자고 해서 이야기하던 중, 얼마 전 고참 하나가 자기 애인하고 부대를 들렸다고 한다. 그런데, 후임병들이 하나도 아는 척은 하지 않아서 당황했다고 하면서, 그 병장은 생활을 잘 하지 않았느냐고 내게 물었다.
 
간부가 보는 것과 함께 생활하던 이들이 보는 것은 많이 다른 것 같다. 그 병장은 왜 부대에 들렸을까?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기가 어찌 생활을 했는지, 후임병들의 모습을 통해 깨달았을까? 아니면 자신을 무시한 후임병들을 욕하며 군대는 오줌도 누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사건이 터진 뒤 장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기억난다.
 
사병들은 어쩌고저쩌고.
구타와 가혹행위는 없어야 한다.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장교에게 물었다.
 
간부 숙소에서 들리는 소리는 뭔가요?
그건 교육이고, 어쩌고저쩌고.
 
가혹행위가 사병들 간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악습의 고리를 끊는 것은 어느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함께 고리를 끊지 않으면, 끊을 수 없다. 이재명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악습의 고리들을 일부라도 끊을 수 있을까?
 

2021년 9월 5일 일요일

눈 물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를 만든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넷플릭스에서 DP가 방영되고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DP 이야기를 하기에 유튜브로 찾아봤다.
 
넷플릭스를 하지 않아서 보지 않은 것도 있지만, 힘든 기억들이 떠오를 까봐 일부러 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가슴은 방망이질이다. 유튜브에 나오는 짧은 영상에도 눈물이 나다니.
 
DP 2014년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기에, 2014년 나는 블러그에 어떻게 적었을까 찾아봤더니 이런 글이 있어서, 그냥 옮겨본다.

 
1990년 그리고 2014
 
7 31() 국립대전현충원에 들렸다.
 
군 시절 내게는 편안한 후임 병이 한 명 있었다. 나는 3월 군번이었고, 후임 병은 6월 군번이었다. 나는 포반에서 근무를 했고, 후임 병은 수송부에서 근무를 했다. 후임 병은 운동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에 다니다 입대를 했고, 사단에서 체육대회가 있으면 자기가 전공하던 종목과 비슷한 씨름 선수로 파견 나가곤 했다.
 
우리는 부대에서 가끔 집합과 얼 차례 및 구타를 당하고는 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우리 때만 해도 조직적인 구타가 제법 있었다. 언제까지 누구 밑으로 어디로 다 모여~~
 
어느 날 6월 후임 병은 나를 붙잡고 울먹였다. 운동을 하면서 많이 맞아도 봤지만 이건 정말 억울해서 못 살겠다며 눈물을 훔쳤다. 사실 고참들은 쌍팔년도 보다는 편해졌다고는 했지만 우리도 꽤나 맞았다.
 
어느 날 입대한지 일주일 밖에 안 된 12월 군번이 몸에 자해를 했다. 부대는 발칵 뒤집히고, 나는 몸에 자해를 한 후임병과 함께 해병 2사단에 갔다가 그곳에서 치료가 힘들다고 해서 국군수도통합병원까지 갔다. 나는 자해한 후임 병을 제일 먼저 발견했기 때문인지 군 앰브란스를 타고 함께 움직였다. 이 사건으로 내 위 군번들은 남한산성으로 갔다. 졸지에 내 바로 위아래 군번들은 남한산성으로 간 선임 병들을 대신해서 후임 병의 군기 잡는 군번에 들어갔다.
 
군인의 길, 고참 서열 등을 후임 병들이 알고 있는지 점검하고, 모르면 식기로 한 대 줘 패는 등의 일을 군기 잡는 다고해야 하나?
 
어찌 되었든 우리 군기 당번들(식기 당번 또는 짬밥)은 후임 병들을 다 불러 모으는 일이 없었다. 그랬더니 지나가던 어떤 간부는 요즘 부대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말을 던지곤 했다. 물론 고참들은 매 번 뭐라 뭐라 하면서 후임 병들의 군기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 그래야 우리가 편하다나 뭐라나. 당시 병장들은 이등병들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후임 병들의 태도가 우리 눈에도 거슬리기 시작했고, 결국 12월부터 6월 군번까지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고참은 후임 병들이 너무 편해서 그런다는 입장이었다. 사실 이 날 모임을 가진 군번들과 그 아래 군번들은 많이 달랐다. 하지만 그것이 후임 병들만의 잘못일까?
 
6월 군번이던 그 후임 병은 후임 병들의 잘못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 선임 병들이 후임 병들에게 잘못된 행동을 보여줬기 때문이 아니냐며 후임 병들에게 요구하기 전에 선임 병들이 태도를 바로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날 모였던 모두가 그 말에 동의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지켜보다가 도무지 안 되겠다 판단이 된다면 그 때 다시 모여 예전 방식을 선택할지 말지를 고민하자고 하고서 흩어졌다.
 
그 사건 이 후 지금까지도 당시처럼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후임 병들을 모아 줘 패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 때 후임 병들이 안 맞아서 그렇다고 판단을 했다면 시간이 지나 그 중 몇 명은 남한산성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 날 이 후 시간이 지나 훈련을 준비하던 6월 군번 후임 병이 사고를 당했다. 후임 병이 안치되었다는 병원에 가서 시신을 국군 수도통합병원으로 옮기는 동안 나는 후임 병의 곁에 있었다. 몸만 차가운 후임 병은 내상을 입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국군 수도통합병원에서 장례 정차를 모두 마친 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갔다. 휴가를 나와 비석으로 된 묘비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후임 병의 묘 자리를 보고 온 것이 1990년이니 벌써 24년 전이다.
 
국립대전현충원 입구에 있는 매점에서 조화를 샀다. 하나는 6월 군번 후임 병을 위해, 또 하나는 군에서 제대를 하고 PC 통신을 하다 하이텔에서 만난 친구를 위해 샀다. 그 친구는 태백에서 목회를 하다가 2013년 사망 할 때까지 보훈 병원에서 투석을 받았다. 친구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던 날 참 많이도 울었다.
 
친구가 안장되던 날 6월 군번이던 후임 병을 찾아 볼 생각을 했는데 이름은 생각이 나는데 성을 몰라 찾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기억을 끄집어내서 결국 인터넷으로 안장 위치를 찾았는데 그 뒤로 1년이 지나 버렸다. 친구에게도 매일 갈 것 같이 말을 했는데 1년이나 지나서야 찾아봤다. 정말 나도 징하다. 국립대전현충원도 묘비가 하나 둘 계속 늘어간다.
 
그 날 오마이뉴스에서 28사단의 윤일병 기사를 봤다. 이 글을 쓰다 8 1 28사단의 윤일병 사건에 대한 후속 기사를 봤다. 할 말은 많은데 막상 쓰려니 허공으로 흩어진다. 28사단 윤일병 가족의 마음을 나는 모른다. 단지, 6월 후임 병의 사망 소식을 모른 채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달려오셨다가 영안실 앞에서 실신하시던 후임 병의 어머니 모습만이 떠오른다.
 

2021년 9월 3일 금요일

쿵쿵따

구로마을TV 활동을 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단면을 본다.
 
다른 이들이 넷플릭스에서 방영되는 DP를 이야기하길레 유튜브에서 DP 설명하는 방송들을 보다가 가슴이 쿵쿵따를 하는 바람에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쿵쿵따라서 이거 잠을 못자서 뛰는 건지, 옛 기억 때문에 뛰는 건지 감이 없다.
 
예전에 쓰던 갈매기의 꿈이나 연재를 해 볼까 생각 중이다만, 지금은 DP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고, 여성 관련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구로마을TV에서 방송을 하다보면 핫한 방송들이 있다. 그런데, 동시 접속률이 핫하다는 것이 아니라 찬반이 갈리는 방송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사실 어제 구로 돌봄과 관련한 방송은 동시 접속자 수가 190명이 넘었지만 방송 자체에 대한 반대 의견은 없었다.
 
그런데 페미니즘 관련 방송을 하면, 동시 접속자 수가 많던 적던 반대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구로마을TV에서 9월 한 달 4번 구로구 여성정책워킹의 지원을 받아 방송을 진행한다. 오늘 9 3일 첫 방송을 하는데, 방송 예약을 어제 늦은 시간에 했음에도 벌써 싫어요가 1이 들어왔다.
 
방송은 오늘 오전 10시 시작임에도 벌써 싫어요가 1. 방송이 끝난 뒤에 싫어요는 얼마나 되어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방송도 보지 않고 - 당연히 시작도 안했으니 - 싫어요를 누른 사람은 무슨 이유로 싫어요를 눌렀을까?
 
내가 DP를 보고 제대를 한지 30년인대도 가슴이 쿵쿵따를 하는 이유와 같은 걸까? 궁금해져서 이렇게 글을 써 본다. 이제 글을 올리고, 방송을 하러 나가야 겠다.
 
방송 주소는 https://youtu.be/cGc3AbOBqRo
 
 

2021년 9월 1일 수요일

이대녀와 이대남? 우리 시대 불평등과 공정을 묻다.

혐오와 차별을 넘어, 더 많은 민주주의를!
구로구 어디나학교 연속강연
 
[1] 이대녀와 이대남? 우리 시대 불평등과 공정을 묻다.
-진행 : 김현주(구로시민센터)
-이야기 손님 : 김건수(청년시국선언원탁회의), 안나(인권네트워크 바람)
 
이대녀? 이대남? 우리 시대 갈등 바로 보기!
청년들이 느끼는 우리 시대 불평등과 진짜 위기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열린사회구로시민회, 구로FM, 구로민중의집, 구로시민센터가 2021 서울시 서남권NPO지원센터 지원사업으로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