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왜 내 편이 아닌데...

지난주부터 산어린이학교 방학 중 돌봄 교사를 하고 있다.

열린사회 구로시민회 사무국장을 그만두고 방학 중 하경이를 봐야 해서 혼자 있는 아이를 보느니 여러 명이 같이 있는 것이 보는 것이 좋아서 하겠다고 나섰다. 처음 돌봄 교실을 진행하겠다고 했을 때 적은 인원이라 큰 부담은 없는데 막상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니 작게나마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하나 둘 보인다.

어제 그러니까 12월 30일 세 건의 회의(?)를 진행했다. 오전엔 남자 아이들 중심으로, 오후엔 여자 아이들 중심으로, 마지막엔 남자와 여자 아이들 골고루...

산어린이학교 방학 중 돌봄 교사로서의 내 자세는 방임과 방관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리 되었는지 원....

서로가 억울한 일도 있고, 그 억울함을 풀어가는 과정들이 참 거시기 하다. 더군다나 딸아이가 포함된 무리와의 회의(?)는 날 더 당황스럽게 한다. 아빠가 자기편을 안 들어준다고 울어제끼는 딸아이를 어찌해야 하나? 시간 날 때 방학 중 벌어진 일들을 정리할 생각이다.

그나저나 일부 보수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친일 모습이 위안부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

군위안부라는 순화된(?) 언어를 사용해서 그렇지 사실 일본 정부에 의한 인신매매로 끌려간 성노예들이었다. 그것을 아무런 사죄도 받지 못하고 돈을 받았다고 좋아라 하는 이들을 본다. 더 나아가 일부긴 하지만 그동안 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자 발 벗고 나선 이들을 좌파집단이라며 공격하고, 이번 12월 28일 위안부 협정을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 내고 있다.

과연 그들이 보수일까? 아니면 친일의 앞잡일까?

잘못은 미워하고,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떠 올리지 않아도 나는 일본이나 일본인을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일본 만화를 좋아한다. 어릴 적 무척이나 좋아했던 만화가 일본 만화라는 사실을 알고 작은 충격을 받았던 적도 있었지만 나이를 먹은 지금도 일본 만화책을 좋아한다. 사실 일본 만화책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 만화책을 보면서 한글을 깨우친 나니 내가 만화를 미워할 수 있겠나? 한 때는 만화가계 주인아주머니가 가계를 맡기고 일을 보러 나가실 정도였으니... 나는 일본인이 쓴 책도, 일본인들의 삶도 좋아하지만 지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현재의 일본 정부와 일본인을 미워한다.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역사는 진정한 사죄와 반성이 없이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2월 28일 일본군위안부 현정을 생각하면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제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그를 따르는 현 정부 그리고 스스로 보수라 주장하는 일부 친일자들에게 화가 난다. 현 일본 정부야 그렇다 쳐도 이게 뭔가? 스스로가 친일파라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한 때 나는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민족주의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주장하는 말이 아니다. 보편적인 생각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하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는 당시 일본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인신매매였다. 그리고 인신매매된 이들을 일본의 군인들은 집단으로 성폭행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찌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인가?

일본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가 대통령이 되고,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다카키 마사오를 신처럼 모시는 이들이 일본군위안부들의 눈물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많은 일들이 있었던 2015년도 역사의 뒤안길로 간다. 시간이 지난 뒤 2015년은 어떤 해로 역사는 기억할까?

사진은 12월 30일 짧은 시간 아이들의 놀이감이 되었던 모습을 6살 하람이가 찍은 것이다. 2015년 마지막 날 사진 몇 장 올린 건 미움 받을 용기는 아니고 그저 웃으실 분은 웃고, 화내실 분은 화내시라고 올렸다. 선택은 자유다.


2015년 12월 29일 화요일

어린이 책을 읽는 어른




책 읽는 장소도 꼭 정해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항상 책 한 권씩은 들고 다니다 책 읽을 자리가 되면 그냥 읽는 것이 좋습니다. 어른이나 어린이나 어디를 다니든지 책 한 권씩을 가지고 다녔으면 합니다. 저도 어디를 가든 책을 갖고 다니는데 어떤 때는 가지고 가서 한 번도 펼쳐 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가지고 다니는 까닭은 책을 가지고 다녀야 마음이 편하고 든든하기 때문입니다. (p.180)


이주영의 어린이 책을 읽는 어른은 웅진닷컴에서 1994년 1쇄를 인쇄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03년 13쇄 판이다. 꽤나(?) 오래된 책이라 다시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옛 추억을 생각하며 다시 손에 들어봤다. 이 책은 한 때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하면서 구입했던 책이다. 당시 어떻게 하면 좋은 책을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소개를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구입했던 책들 중 하나다.

2004년 광명시 광명7동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어린이도서관 이름을 징검다리라고 정하고, 2번의 실사(10월 22일과 11월 24일)를 거쳐 12월 1일 광명시에서 징검다리 어린이도서관을 문을 열렸다. 처음 징검다리 어린이도서관을 준비할 때 도서관 담당 직원은 교회에서 하는데 왜 문고 설립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을 하기도 했었고, 어떤 직원은 문고는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말까지 했었다. 당시 3층 건물에 2층을 교회가 사용하고 있었는데 교회 중간을 자바라로 막고 입구 부분을 어린이도서관으로 사용했다.

2004년 징검다리 어린이도서관 개관을 준비하면서부터 2008년 초 문을 닫을 때까지 광명 동화읽는어른, 어린이전문서점 동원, 청개구리 도서관, 평생학습원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책을 읽으며, 책 읽는 환경, 어린이 책 사랑방, 모임 등 여러 이야기들이 떠오르지만 어린이도서관을 문 닫은 관장이 무슨 말을 하겠나 단지, 지금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활동하는 분들에게 누군가 함께 해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함께 하지 않고 바라만 본다면 결국 그가 쓰러져가는 모습을 바라 볼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다시 종이 책을 든다. 한 동안 핸드폰으로 책을 읽다가, 다시 종이 책을 든 이유는 작은 아이가 아빠는 핸드폰만 한다고 해서 다. 작은 아이에게는 아빠는 핸드폰만 하는 사람으로 불리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요즘 너무 자주 듣는 것 같아 핸드폰으로 책을 읽느니 아이들에게 종이 책을 들어 읽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종이 책을 들었다.

사진은 징검다리 어린이도서관에서 2005년 8월 22일 여름방학프로그램으로 진행했던 곤충 만들기와 2006년 광명시 평생학습원에서 진행하는 시민제안프로그램 ‘오감으로 만나는 생생나들이(부제:체험학습)’ 중 11월 13일 수원성 체험학습을 다녀온 사진이다.

하경이는 2006년에 입양을 했는데 당시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할 때였기 때문에 늘 책이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일어나면 책을 보며 놀았는데 한글은 초등학교에 가서 배웠다^^ 사진은 2006년 도서관에서 자고 있는 하경와 다우가 찍은 것이고, 2015년 방학 중 방과후를 하면서 잠시 들린 부천시 송내 어울마당 안에 있는 송내 도서관에서 컴퓨터로 책을 검색하는 모습이다.

둘째 하람이는 언니의 조기 교육 덕분에 자기 이름을 쓸 수 있는 수준인데 궁더쿵 어린이집이 방학이라 언니를 따라 방학 중 방과후에 따라와 들린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는 사진이다. 그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읽는 다는 말은 쓸 수가 없어서 보고 있다고 쓴다.



2015년 12월 27일 일요일

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





나는 우리가 거리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잘 다듬어진 거리, 잘 다음어진 규격, 잘 다듬어진 생활의 편리성을 넘어 조금씩 틈을 가지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잘 다음어진 규격 속에 놓이지 않기를 바란다. 따라서 나는 사진을 배우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후미진 골목 가장 발길이 뜸한 곳까지 깊숙이 들어가 보라고 권한다. 거리의 자유는 잘 가꿔진 가로수, 멋진 보보블록을 밟는 데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방종에 가까운 10대를 보낸 내게 어디든 카메라를 갖다 대기만 하면 다른 그림이 나오고 무수한 삶의 스펙트럼을 관찰할 수 있는 그곳이 진정한 자유공간이었다. 10대의 치기도 한몫을 했겠지만 우리네 현실이 북새통 전쟁 끝에 열려있던 부분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잘 다듬어지기 전에 거리에서 한 번은 자유로워지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P. 218


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는 한국방송출판에서 2010년에 나왔는데 고명진이 쓰고 조천우, 최진이 정리한 책이다.

고등학교 때 잠시 사진부에서 활동을 했었던 기억 때문인지 사진과 관련한 책들 특히 사진들을 볼 때는 기분이 좋다. 고명진의 글을 읽으면서 사진을 찍는 마음에 대해 생각을 했다.

고명진의 책은 최근 응답하라 1988에서 다루지 않은(물론 성보라를 통해 당시 상황을 살짝 건드리긴 했지만) 1980년대의 많은 이야기들을 볼 수 있는 책이다.

고명진을 통해 바라 본 기자의 삶 그것도 사진 기자의 삶은 치열하다. 고명진의 책을 보면서 떠오르는 사람은 2007년 미얀마의 양곤에서 취재하던 중 사망한 나가이 겐지다. 나가이 겐지는 총에 맞아 쓰러진 상태에서도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2015년 민중총궐기에 응답하여 소요죄라 주장하는 박근혜 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고명진의 1980년대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세월호, 천안함 등 수 많은 사건과 사고 앞에 고명진이나 나가이 겐지와 같은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고명진이 말한 그날 그 거리의 1980년대는 흘러갔다. 2015년 우리는 자유로운 거리를 걷고 있을까? 가슴이 답답하다.

사진은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동 로터리(p.108), 2007년 미얀미 양곤에서 숨진 나가이 겐지, 총을 맞고 쓰러진 나가이 겐지, 1988년 11월 3일 서강대 앞(p.52)



2015년 12월 21일 월요일

무작정 길을 나서다.

12월 20일 하경이가 놀러가보지 않은 놀이터에 가자고 해서 고민이다. 어디 아무 아파트 놀이터에나 가서 놀려고 길을 나섰다. 하경이가 갑자기 동물원을 가자고 해서 부천식물원을 향해 가는데 하경이 소리를 들어보니 인천어린이대공원에 가자는 소리다.

인천어린이대공원으로 가려다가 시간이 어정쩡해서 하경이와 이야기 한 후 부천식물원으로 급선회했다. 부천식물원에 주차를 하고 동물이 있는 곳에 잠시 들렸다가 무릉도원수목원으로 넘어가 놀다가 돌아왔다.

예전에는 부천식물원 뒤편 동물들이 있는 곳에 사슴과 타조가 제법 넓은 공간에서 생활을 했었는데 지금은 수목원 길을 내느라 그랬는지 사슴과 타조가 작은 공간에서 생활을 한다. 타조는 계속 부리로 철망을 쫀다. 쪼는 소리가 들릴 때 마다 내 마음도 쿵쿵 거린다. 내가 동물권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마음이 편치가 않다. 그래서 사진을 못 찍었다.

무릉도원수목원을 개장하기 전에도 가끔씩 갔었는데 저수지 있고 할 때보다는 깨끗해졌는데 지금처럼 깨끗하게 정리된 것 보다 예전 모습이 더 좋았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마도 착각이겠지?

그나저나 겨울이라 사람이 많지 않아 한적해서 좋았다.


2015년 12월 18일 금요일

궁더쿵 해보내기

궁더쿵 해보내기 준비 중

어린이집과 cctv

어린이집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문제들을 제어하기 위해서 CCTV를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을 듣다보면 우리 사회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린이집에도 거리에도 CCTV를 달아야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화질이 선명한 CCTV를 설치해야 한다며 새롭게 CCTV를 설치하거나 기존에 있던 CCTV를 바꾸는 것에 정부나 지자체 예산을 쏟아 붓고 있지만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안전하게 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문제들을 해경하는 방법이 CCTV 설치만이 진리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CCTV를 통한 감시보다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해야 한다. 교사의 노동조건과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부모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어린이집이든 유치원이든 보낼 수 있도록 누리과정 예산을 안정적으로 집행될 수 있도록 편성해야 한다.

2014년에도 많은 부모들이 누리과정 지원이 끊기는 것이 아니냐며 당황해했고, 2015년에도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있는 부모들은 당황하고 있다. 누리과정 예산이 안정적으로 집행이 될 수 있도록, 현재와 같이 아랫돌 빼서 윗돌 막고, 윗돌 빼서 아랫돌 막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학기제를 바꾼다고 출산율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안정적인 환경이 없이는 출산율은 높아지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고 말만하지 말고 세상에 이미 나온 아이들이 살아갈 환경을 안정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출산율이 오를 것이다.

궁더쿵 어린이집에서는 부모들이 CCTV 설치를 반대해서 현재 CCTV가 없다. 대부분의 공동육아를 하는 어린이집에서는 CCTV 설치를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부모나 교사가 서로를 믿고 존중하는 것이 CCTV를 설치하는 것 보다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부모와 교사가 공책을 주고받고 있는데 이것을 날적이라고 부른다. 날적이를 통해 교사나 부모는 아이의 집에서의 생활이나 어린이집에서의 생활을 알 수 있다. 아내가 쓴 날적이에 이런 글이 있다.

2015년 12월 16일

나 : 드르렁 드르렁 (코 고는 소리)
하람 : 코 골지 마 (작게)

나 : 드르렁 드르렁
하람 : 코 골지 마 (조금 큰 소리로)

나 : 드르렁 드르렁 드르렁
하람 : 코 골지 마 (큰 소리로)

아내 : 아빠한테 살살 말해야지
하람 : 아빠가 코를 방구처럼 크게 골잖아!


이광흠(깡통)의 카카오뮤직( http://kko.to/pw5Hfrn2M )

2015년 12월 17일 목요일

광장과 태극기 그리고 애국심

최근 서울시에서 광화문 광장에 대형태극기를 설치 못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말이 많다. 말이야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던 나오기 마련이지만 사실 애국심이 어쩌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읽다보면 나는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중학교를 다닐 때...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대통령이 어디를 다녀오면 자주는 아니었지만 어쩌다가 태극기 흔들러 나가던 학교들 중 하나였다. 어쩌다 대통령을 위해서 태극기를 흔들게 되는 날이면 우리들은 차량(트럭이었는지 승합차인지 모르겠다)에서 나눠주는 작은 태극기를 들고 마구 흔들었다. 그 날은 학교 수업이 다 안 끝났던 것 같다.

우리는 대통령이 오기 전부터 태극기를 흔들었지만 혹여나 건너편에서 여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드는 경우라도 생기면 다들 정신없이 태극기를 흔들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흔들고,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향해 흔들고, 버스가 지나가도 흔들고, 지나가는 경찰에게도 우리는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성을 쳤다. 애국심? 그냥 손에 들린 건 태극기요. 없어져야 할 건 시간이니 우리는 그저 손에 든 것을 마구 흔들었을 뿐 애국심은 아니었다.

대통령이 짧은 시간 우리 앞을 지나간 뒤 그 많은 태극기들은 어찌 되었을까? 뭐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죄다 쓰레기로 던져졌다. 집에 들고 간 사람도 있지 않겠냐고?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내 주변에 있던 태극기들은 애들이 너무 흔들어 대서 다 찢어졌던 것만 생각난다. 태극기는 작았고, 재질은 얇은 종이였으니 혈기 왕성한 남자 녀석들이 마구 흔들었는데 그게 성하면 이상한 거 아닌가? 그리고 때때로 누가 더 빨리 흔들어대나 경쟁 아닌 경쟁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안 찢어져도 꾸깃꾸깃한 상태가 되었으니 그런 태극기를 누가 집에 들고 갔을까? 태극기는 그렇게 길바닥에 버려지거나 쓰레기 통으로 갔다.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마구 흔들어도 애국심은 생기지 않는다. 하물며 태극기를 바라본다고 절로 생길까? 태극기는 상징일 뿐 실체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서울시 결정에 대해 국가관이며 애국심을 이야기하는 상황이 당황스럽다.

사실 광화문 주변에는 서울시 말처럼 태극기 걸 곳도 많다. 그런데 왜 굳이 광화문 광장에 대형 태극기를 달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걸까? 정말 애국심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박원순 시장과 한 바탕 해야 할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면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선 사람들로 이 나라가 행복 만땅일까? 광복 70주년도 좋은데 지금 남과 북한의 관계가 평온한가? 아니 남한 내에서라도 평안한가? 애국심? 태극기만 집집마다 내건다고 애국심이 절로 나나?

지금 광화문 광장에는 아직도 세월호에 대한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에 대한 청문회를 한다고 해도 대형 방송사에서는 보여주지도 않고, 한 증인은 생명을 잃은 사람들에게 철이 없다는 말이나 하고, 다른 증인들의 불성실한 태도를 보면서 사람들은 당황스럽다.

아래 사진은 고명진이 쓴 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에서 실린 사진이다. 1987년 부산 문현동에서 찍은 사진인데 이런 태극기를 보면 다들 어떤 생각들이 들까?



불가능과 어려움의 차이

12월 16일에 쓴 바람이 아닌 사실에 대해 cbs에서 답 글을 올렸습니다.

애청자 님, 보내주신 의견 감사합니다.

저희가 재확인해본 결과,
정익중 교수의 발언은 사실입니다.
개정된 입양특례법에 의거해, 입양을 하기 위해서
아이는 반드시 생모에 의해 출생등록이 필요해졌습니다.
따라서 출생신고 없이 베이비박스에 바로 버려지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입양이 힘들다고 합니다.

다만 이 아이들이 보육원으로 보내지면
6개월 후에 보육원 원장님이 아이 이름으로 단독 호적을 만들어줍니다.
아이가 18세가 될 때까지 보육원 원장이 후견인이 되는 거죠.
그 뒤로 입양은 후견인의 동의 없이 불가능한데요,
희한하게도 그렇게 되면 입양이 정말 어려워지는게 보통이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많은 분들이 입양특례법의 재개정을 촉구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다음 기사를 참고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Tenman/report_last.aspx?CNTN_CD=A0002109669


cbs의 답 글을 읽고 잠시 어의가 없어 웃다가 자판을 두드립니다.

cbs가 여러 번 글을 쓰게 하네요... ㅎㅎㅎ

정익중 교수의 발언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진실이 아닙니다.

입양이 어렵다는 것과 불가능하다는 것의 차이는 어감만의 차이가 아닙니다.

베이비박스로 들어온 아이들은 부모를 찾다가 찾지못하면 보육원으로 갑니다. 그렇지만 베이비박스를 거쳐 간 아이들 중 보육원이나 서울시아동복지센터를 통해서 입양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먼저 글(바람이 아닌 사실)을 읽고 자신은 베이비박스를 거친 아이를 입양한 부모라면서 놀라서 내게 연락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cbs의 답변처럼 현재 베이비박스를 거쳐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고 그들 중 상당수가 그곳에서 성장하게 되지만 cbs의 답변에서도 입양이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cbs의 답변을 보면 입양특례법이 2012년 전면 개정된 후 베이비박스를 거쳐 가는 아동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 같은데 현재의 입양특례법은 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난 아동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미혼모 시설에서 아이를 낳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입양 보내기 원했을 때 만약 아이가 입양되지 않는다면 아이가 입양이 될 때까지 낳은 어머니의 호적에 남아 있게 됩니다. 현재는 아이가 입양되기 전 까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입양특례법에 대한 재개정 촉구는 2012년 전면 개정될 때부터 입양부모들이 요구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김익중 교수가 말한 것처럼 아이가 자신을 낳은 어머니의 호적에 입양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입양특례법의 재개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베이비박스에 아이들이 모여드는 현상을 입양특례법에서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먼 저 글(바람이 아닌 사실)이나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정익중 교수의 말(베이비박스를 통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부모와 멀어진 아이들은 입양이 불가능하다)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글을 쓴 것입니다.


◆ 정익중> 입양이 불가능합니다. 입양이 되려면 부모, 친부모의 동의가 필요하거든요. 이 아이 같은 경우에는 친부모의 동의가 없기 때문에, 친권포기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 아이는 평생 양육시설에 살 수밖에 없는 이런 처지입니다.

◇ 김현정> 그러니까 지금 버린 부모를 체포하지 못하면, 잡지 못하면 친권포기 도장을 받지 못하니까 입양이 불가능한.

◆ 정익중> 맞습니다.

◇ 김현정> 지금 우리 법이 그런가요?

◆ 정익중> 맞습니다.

◇ 김현정> 그러면 베이비박스 같은 데 버리고 가는 아이들, 집 앞에 놓고 가는 아이들 다?

◆ 정익중> 베이비박스에 놓고 가면 아이들이 좋은 곳에 입양될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실제로 불가능합니다. 출생신고 없이 이런 바로 입양되는, 친권포기절차 없이 입양되는 경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범죄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입양특례법의 내용입니다.

제2장 입양의 요건 및 효력

제9조(양자가 될 자격) 이 법에 따라 양자가 될 사람은 요보호아동으로서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1. 보호자로부터 이탈된 사람으로서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 및 특별자치도지사(이하 "시·도지사"라 한다)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자치구의 구청장을 말한다. 이하 같다)이 부양의무자를 확인할 수 없어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 따른 보장시설(이하 "보장시설"이라 한다)에 보호의뢰한 사람

2. 부모(부모가 사망이나 그 밖의 사유로 동의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직계존속을 말한다) 또는 후견인이 입양에 동의하여 보장시설 또는 제20조에 따른 입양기관에 보호의뢰한 사람

3. 법원에 의하여 친권상실의 선고를 받은 사람의 자녀로서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이 보장시설에 보호의뢰한 사람

4. 그 밖에 부양의무자를 알 수 없는 경우로서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이 보장시설에 보호의뢰한 사람


2015년 12월 16일 수요일

바람이 아닌 사실

지난 12월 11일 아침에 들은 라디오 내용 때문에 며칠째 심난하다. 아침마다 듣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정익중 교수가 한 말 때문이다.


◇ 김현정> 그나저나 교수님, 지금 청취자 천익종님 외에 여러 분이 문자도 주셨습니다마는 ‘이번에 강릉에서 발견된 그 음식물 쓰레기통의 아기, 경찰분 말씀에 의하면 보호센터를 일단 돌다가 입양이 잘되면 그게 최선이다, 그 아이한테.’ 그 말씀하시더라고요. 보통 이런 경우에 입양이 잘 되나요?

◆ 정익중> 입양이 불가능합니다. 입양이 되려면 부모, 친부모의 동의가 필요하거든요. 이 아이 같은 경우에는 친부모의 동의가 없기 때문에, 친권포기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 아이는 평생 양육시설에 살 수밖에 없는 이런 처지입니다.

◇ 김현정> 그러니까 지금 버린 부모를 체포하지 못하면, 잡지 못하면 친권포기 도장을 받지 못하니까 입양이 불가능한.

◆ 정익중> 맞습니다.

◇ 김현정> 지금 우리 법이 그런가요?

◆ 정익중> 맞습니다.

◇ 김현정> 그러면 베이비박스 같은 데 버리고 가는 아이들, 집 앞에 놓고가는 아이들 다?

◆ 정익중> 베이비박스에 놓고 가면 아이들이 좋은 곳에 입양될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실제로 불가능합니다. 출생신고 없이 이런 바로 입양되는, 친권포기절차 없이 입양되는 경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범죄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베이비박스에 있던 아이들도 입양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익중 교수는 불가능하다고 말을 했다. 그래서 알아봤다.

방송을 듣고 당황한 나는 12월 11일 베이비박스에 전화를 했다. 페이스북을 찾아보니 2개의 전화번호가 있어서 그 중 한 번호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분은 시설이 두 곳이라며 이곳은 장애아동을 돌보는 곳이라 말을 했다. 전화를 받으신 분은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도 입양이 된다며 다른 번호로 통화를 하면 자신보다 내용을 잘 알 것이라 말을 했다. 담당자가 외부에 나갔기 때문에 오후 5시 쯤 전화를 하라고 했지만 내가 정신이 없어 전화를 못했다.

12월 16일 페이스북에서 지인이 입양 진행한다는 글을 봤다. 지난달에는 또 다른 지인에게 아이가 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가까운(?) 곳에서 입양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 생긴다는 것이 좋았다. 나도 두 명의 딸을 입양한 아빠기 때문에 더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12월 17일 이른 시간 베이비박스의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babyboxkorea )과 서울시아동복지센터( http://child.seoul.go.kr/ )에 정익중 교수의 말에 대한 궁금증을 물었다. 페이스북 베이비박스는 정익중 교수가 잘 못 알고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는 답 글을 올렸고, 서울시아동복지센터는 답 글을 기다리다 전화 통화를 했다. 베이비박스에 있던 아이들이 거쳐 가는 곳이기 때문에 전화를 한 것이다. 담당자는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들도 입양이 되고 있다는 말을 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듣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다. 방송을 듣는 사람들은 그가 전문가라고 생각하고 그의 말을 큰 의심 없이 듣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정작 반박할 사람들은 그 내용을 듣지 못했으니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모른다. 결국 그의 말은 방송을 들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건드리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익중교수는 베이비박스에 아이들이 모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물론 나도 베이비박스에 아이들이 모여드는 현상을 좋게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베이비박스에 모이게 되는지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들이 모이는 이유를 한 쪽에서는 입양특례법으로 인해 생긴 문제라고 보고 다른 한 쪽에서는 입양특례법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베이비박스로 인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만약 베이비박스가 없었다면 어떤 일들이 생겼을까?

정익중교수의 말처럼 다양한 시설이 있고, 한 부모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도 없어져야 하고, 정부의 지원도 있어야 한다. 문제는 베이비박스를 통하거나 통하지 않거나 입양이 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입양특례법 이 후 늘었다는 사실이다. 정익중교수는 한 해에 200에서 300명의 아이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을 했다. 그 말은 전쟁도 없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최소한 이틀에 한 명의 아동이 부모와 멀어지고 있다는 말이며 그 아동들 대부분이 아동보호시설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동이 자신을 낳은 부모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의 아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왜 나이 어린 부모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베이비박스 때문이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저 개인적인 바람은 베이비박스를 통하든 통하지 않던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낳은 부모와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아이들이 새로운 가족과 만났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응답하라 1988을 보며 가족과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가족에 대한 생각을 한다. 이 아이들도 시간이 지난 뒤, 아니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가족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베이비박스의 아이들도 입양이 된다는 것이다. 이 건 바람이 아닌 사실이다.


2015년 12월 15일 화요일

알고나 있을까?

지난 12월 10일(목) 구로갑 새정치민주연합 이인영 국회의원 의정보고대회가 있었다. 한번 가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길을 나섰다. 주차를 하고 행사장으로 들어가는데 나가는 사람들 이 있다. 그 중 아는 얼굴이 보여 인사하자니 행사장 안에 사람이 많단다.

행사장에 들어가 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보여 인사를 하고 주변을 돌아봤다. 행사 중간에도 사람들은 계속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도 간간히 보였다. 민수씨를 만났다. 정의당구로구위원회 통합대회 및 노회찬 기념강연회가 18일에서 22일로 변경되었단다. 바뀐 내용을 아직 연락받지 못했다고 말을 하니 조만 간 연락을 할 거란다.

구로구청 강당에서 구로마을공동체 화합한마당이 있어서 구청으로 향했다. 구청 강당에 도착하니 행사 준비에 분주하다. 이호성 위원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구청으로 오고 있단다. 구로을 박영선 국회의원, 새누리당 구로을 문형일 당협위원장이 왔는데 박영선 의원은 다음 일정이 있다며 먼저 인사를 했다. 행사 중반에 이인영 의원과 이성 구청장이 들어왔다. 다들 바쁘게 산다. 정치인만 기억하냐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지금하고 싶은 이야기는 2016년 4월 선거 때문에 다들 바쁘게 살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시끄럽다. 어떤 분에게 물으니 선거 때마다 그렇지 않냐고,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나는 당황스럽다. 도대체가 뭐하자는 거지?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을 장기판의 졸로도 보지 않는 것 같은데,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국민들은?

마을에는 새누리 사람도, 새정치민주연합 사람도, 정의당 사람도, 노동당 사람도, 녹색당 사람도 산다. 물론 당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

2016년 벌써 아니 그 이전부터 선거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뜨겁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2016년 선거구 확정은 어찌 되었나? 그나저나 이윤석은 자신의 말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지 이유를 알고나 있을까?


2015년 12월 14일 월요일

철 모르는 개나리...

지난 12월 9일(수) 하람이와 부모님이 계신 곳에 다녀왔다.

하경이는 엄마와 학교에 가고, 하람이는 궁더쿵 어린이집을 빠지고 아빠와 같이 갔다.

하람이는 혼자서 안전밸트를 하고 앉아있는 것이 힘든지 할머니네 언제 도착하느냐며 노래를 불러댄다. 결국 휴게소, 졸음쉼터, 주차장에 들려 놀다가 가야 했다.

점심을 먹은 뒤 할아버지 일하는 곳에 잠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보니 개나리가 피었다. 철 모르는 개나리...

하람이는 할머니네 가면 TV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좋아한다.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가 늦은 시간 집으로 올라왔다. 하람이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잠을 잤다.


2015년 12월 11일 금요일

한 걸음 발을 내 딛는 용기

한 걸음 발을 내 딛는 용기

내가 구로시민회를 알게 된 것은 2008년 광명시에서 구로구 궁동으로 이사를 한 뒤 첫째 아이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면서였다. 궁더쿵 어린이집에서 당시 구로시민회 사무국장이었던 이병창 대표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2009년부터 회원으로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궁더쿵 어린이집에서 만난 조원식씨와 2009년 구로시민회에서 진행한 전래놀이 활동가 양성 과정에 참여했던 분들과 전래놀이 관련 모임을 만들어 활동을 하면서 구로시민회와 깊은 관계를 가져오다 2012년 교육팀장이라는 이름으로 상근 활동을 시작했고, 2013년부터는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2015년 사무국장의 직을 그만 두게 되었다. 짧은 상근활동을 하였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얻은 시간이었다.

고민도 있었다.

구로시민회 사업에 대한 지역 내 연합활동을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금은 뒤로 빠져서 구로시민회 사업을 중심으로 연합활동을 붙여나가는 것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함께 할 것인가라는 고민이었다.

시민이 없는 시민단체라는 우스개가 있다. 웃고 넘기기에는 생각이 많아지는 우스개다. 구로시민회에서 해 뜨는 집 활동이나 전래놀이와 관련한 활동, 지역축제와 어린이날 행사 등을 참여하면서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보다는 작지만 필요한 일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자원봉사를 나왔던 청소년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고, 지역 축제를 준비하며 함께 한 기관이나 지역 주민들과 축제가 끝난 이 후에도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구로시민회 회원이나 후원인들에게 구로시민회가 지금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문자로 소식을 전한 것은 상근자나 몇 명의 열성적인 회원들만의 활동이 아닌 좀 더 많은 회원들의 관심과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고자한 노력이었다. 내가 큰 무리없이 사무국장의 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대표들을 비롯한 운영위원들의 협조 덕분이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나는 한 사람의 백 걸음 보다 백 사람의 한 걸음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시국이 어수선하다. 현재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한 걸음 발을 내 딛는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이 글을 쓰며 사무국장이 아닌 개인으로 돌아와 나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세상을 위해 내 옆에 선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 걸음 발을 앞으로 내 딛는다.

2015년 12월 8일 화요일

차별이야 차별...

12월 6일 일요일 오후 하경이가 놀이터에 가자고 해서 하람이 가방에 귤을 잔뜩 집어넣고서 길을 나섰다. 집에서 먼 곳으로 가자고 해서 천왕동으로 향했다. 우신빌라 앞에서 버스를 타고 천왕역에서 내려 연지타운으로 넘어갔다. 연지타운 놀이터에서 잠시 놀다가 길 건너 1단지 맞은 편 2단지 아래 놀이터로 가자고 해서 구로 올레길 3코스 길을 따라 4단지로 넘어가서 2단지 방향으로 내려갔다.

놀이터에서 하경이와 하람이는 싸온 귤을 다 먹었다. 귤을 먹는 동안 하람이가 귤을 까 달라고 해서 까줬더니 하경이가 자기도 까달라고 한다. 싫다고 했더니 차별이란다. 차별.

요즘 하람이가 입양아라는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것 같다. 6살 하람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지는 것 같다. 첫째였다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다 기록했겠지만 둘째다보니 하람이의 반응을 바로 바로 기록하지 못하고, 그러다보니 글을 쓰려니 하람이가 어찌 말을 했는지 기억에 없다.

하람이가 입양에 대해 혼란스러워 할 때마다 나는 네 아빠다라는 말을 해 주고 있고 아내도 나는 네 엄마다라는 말을 해 주고 있다. 물론 하람이를 낳은 엄마도 있다는 것도 말을 한다. 6살 아이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나는 아이에게 입양 사실을 숨긴다는 것이 불가능할 때는 정면승부가 답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혼란스러워할 때 같이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아이에게 너는 내 자식이다라는 말을 해주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말을 한다. 너희는 내 딸들이다. 하경이는 첫째라 6살 때 혼란스러워하던 모습을 블로그에 많이 적었는데 하람이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경이가 6살 때 하람이가 입양되었다. 하경이에게 갑자기 생겨난 동생 때문에 당황하던 모습들과 기뻐하던 모습들을 글로 적었는데 둘째인 하람이는 생각보다 글이 많지 않다. 바쁘다는 핑계로 글을 많이 못 적었다.

하경이를 처음 입양하고 아니 입양하기 전부터 이런 저런 생각들을 끄적였던 글들이 있는데 물론 하람이를 입양하기 전에도 글을 적었지만 첫째와 둘째는 확실이 다른 것 같다. 한 번 키워봤기 때문일까? 그래서 하람이가 손해를 보는 것도 있지만 손해보다는 이익이 더 많다. 하경이에게 했던 실수들을 하람이에게는 많이 안하기 때문이다.

하경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끔씩 들게 되는 것은 하경이가 다 큰 아이처럼 생각을 했는데 하람이를 보니 하경이가 그 때는 참 어렸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보모들이 둘째를 보면서 첫째를 생각하는 모습일께다.

대충 바쁜 일들이 끝이 났으니 아이들 모습을 남겨야겠다. 그래야 시간이 흐른 뒤 추억이라는 선물 하나 남겨 놓을 수 있을 것 같기에... 응답하라 씨리즈는 아니더라도 우리 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아빠와 엄마의 모습을 자신들의 기억과는 또 다른 이야기들도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다.